아주 보통의 하루를 기록합니다.

감성 글쓰기와 영어 성장, 그리고 꾸준함의 힘.

감성에세이

🌿 한국근현대사 박물관에서 — 오래된 풍경을 지나며

영어하는 할매 2025. 11. 24. 08:00



파주 헤이리 한국근현대사 박물관에서 떠오른 기억과 마음을 기록합니다.

 

한국근현대사 박물관.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오래된 냄새와 빛바랜 간판들이
우리를 하나같이 ‘각자의 과거’로 불러 세웠다.
같은 공간을 걷고 있었지만,
각자의 마음속에서는 서로 다른 시간이 동시에 열리고 있었다.



✦ 곤로 앞에서 — 기억의 첫문이 열리다

“여보, 이거… 당신네 집에 있었잖아.”

곤로 앞에 선 남편이 내 얼굴을 보며 말했다.
그 말에 순간 웃음이 났다.

어릴 적 우리 집 부엌 한쪽엔 늘 저런 곤로가 있었다.
엄마는 그 위에서 국을 끓이고 감자를 삶고,
아침이면 따뜻한 수증기가 부엌을 가득 채웠다.

그러자 딸아이가 말을 보탰다.

“나, 이거 외할머니 집에서 본 것 같은데?”
남편: “아니야. 너 때는 없었어.”
딸: “그럼 내 기억이 잘못된 겨? ㅎㅎ”

짧은 대화였지만
서로 다른 결을 가진 기억들이
한순간에 겹쳐지는 장면을 곁에서 보고 있었다.



✦ 공중전화 앞에서 터진 웃음

공중전화 박스 앞에서
남편이 마치 큰일이라도 난 것처럼
과하게 급한 연기를 하며 전화를 거는 시늉을 했다.


정작 무슨 내용인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그 우스운 연기 하나로
우리는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오래된 물건 하나가
사람을 그렇게 가볍게 만들 줄이야.



✦ 지붕 위 소쿠리 — 엄마의 계절과 마주하다

전시를 따라 걷다 보니,
지붕 위 소쿠리에서
고추와 생선을 말리던 풍경이 보였다.

“아… 이건 우리 집이었네.”

엄마는 늘 소쿠리를 햇볕 좋은 자리에 올려두고
고추를 뒤집고, 마른 생선을 들여다보던 사람이었다.
바람의 방향, 빛의 각도, 습기까지 읽어내던 그 손길.

그 앞에 서니
내 어린 시절의 계절 냄새가 다시 살아났다.



✦ 다디미 앞에서 떠오른 손길

남편이 다디미 방망이를 들고
장난스럽게 두드리는 시늉을 했다.

그 소리 하나에
엄마가 풀 먹인 옷감을 다디미로 두드리던 장면이 떠올랐다.
꼿꼿한 교복 카라,
친구들이 부러워하던 그 반듯한 선.

작은 장난 하나가
오래된 손길을 고요하게 불러냈다.



✦ 시계점 앞에서 나는 오래 서 있었다

마지막 전시관, ‘시계점’ 앞에서
나는 더 이상 걸음을 옮길 수가 없었다.

그곳엔 아버지가 있었다.

평생 금은방과 시계점을 지키던 분.
한쪽 눈에 돋보기를 끼고
작은 시계를 들여다보던 모습.

저녁이 되면 셔터를 천천히 내리던 소리,
엄마가 싸준 도시락을 들고
가게 문을 열고 들어가던 내 어린 발걸음.

그 풍경들이
낮은 숨결처럼 전시관 안에 겹쳐 앉아 있었다.

나는 한참을 울었다.
그리움은 늘, 우리가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조용히 손을 내민다.



✦ 우리가 걸었던 공간, 우리가 떠올린 시간

같은 박물관을 걸었지만
우리는 각자의 골목을 다녀왔고,
그 골목에서 되살아난 시간과 장면들은
각기 다른 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그 ‘다름’이
그날의 풍경을 오히려 더 깊고 넓게 만들어 주었다.




✦ 마무리

오래된 물건들이 우리를 불러세운 날,
나는 마음속 서랍에 묵혀 있던 기억들을
조용하고 고요한 빛으로
다시 꺼내어 보았다.

그날의 박물관은
시간을 전시한 곳이 아니라
‘기억을 다시 불러내는 공간’이었다.



✦ 독자에게

박물관이나 전시회를 걷다 보면
마음속 어디선가 오래된 장면이
슬며시 올라올 때가 있지요.

여러분은 그런 순간,
자주 마주하시나요?





© 2025. 아보하 언니 (Aboha Unni). All rights reserved.

이 글에 포함된 모든 콘텐츠는 창작자의 저작물이며,

허가 없는 무단 복제 및 상업적 이용을 금지합니다.

문의: beverly7[at]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