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설이 몰아친 겨울 밤, 각자의 자리에서 겪은 긴장과 마음의 흔들림을 기록한 이야기.
잊고 있던 예약, 멈춰 선 차들, 남편의 고된 귀가와 작은 라면 한 그릇 앞에서의 갈등까지 —
⸻
약속이 취소된 날, 뜻밖의 여유
12월 3일.
지인이 다음 날 약속을 미루자고 연락을 해왔다.
영하권 강추위 예보를 듣고 걱정됐던 모양이다.
나도 마침 처리해야 할 일들이 잔뜩 쌓여 있던 터라
“그래, 다음에 봐” 하고 흔쾌히 답했다.
그 순간, 마음이 슬며시 가벼워졌다.
뜻밖에 하루가 비어버린 느낌.
제대로 된 여유를 얻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
잊고 있던 예약, 원치 않았던 외출
다음 날.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여러 번 왔지만 받지 않았다.
문자를 확인하고서야 알았다.
‘오늘 6시 피부과 예약.’
아…
외출 안 해도 되는 날이라 좋아하고 있었는데.
조용히 집에만 있고 싶었던 마음을 붙잡아두고
겹겹이 옷을 챙겨 입고 다시 밖으로 나섰다.
그때까진 눈발이 가볍게 흩날리는 정도엿다.
“집에 돌아갈 때 첫눈 사진 하나 찍어야지”
속으로 여유로운 생각까지 들었다.
⸻
진짜 겨울이 찾아오던 순간
피부과를 나서자,
하늘은 이미 다른 세상이 되어 있었다.
눈이 펑펑.
그냥 오는 게 아니라
사선으로 쏟아지는 거대한 흰 뭉치들.
도로, 길, 차, 지붕, 사람들 어깨 위—
이미 눈이 한 움큼씩 소복하게 쌓여 있었다.
“이 정도 폭설은 처음인데…?”
집까지 산책하며 천천히 돌아오려던 계획은
바로 버스 정류장으로 향하는 발걸음으로 바뀌였다.
⸻
버스 안은 또 하나의 겨울이었다
버스는 이미 사람들로 가득했다.
문이 열릴 때마다
사람들과 함께 한 움큼의 눈이 와르르 들어와
버스 바닥은 금세 물기로 번들거렸다.
앉아 있던 사람들은
손바닥으로 유리창을 문지르며 하얗게 뒤덮인
바깥 풍경을 내다보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천둥 같은 소리가 두세 번 울렸다.
눈 오는 날 천둥이라니—
순식간에 여기저기서 놀란 탄성이 터져 나왔다.
이상한 겨울 풍경 속에서
버스 안은 잠시 조용해졌다.
⸻
남편의 귀가, 멈춰버린 차
7시쯤 그에게 전화가 왔다.
“이제 출발했어. 집으로 가는 중이야.”
그때까지만 해도 그럼
비슷한 시간에 도착하겠지 싶었다.
하지만 9시가 되어도 연락이 없었다.
전화해 보니,
차가 도로 한복판에서 완전히 멈춰 있다고 했다.
11시가 넘어 다시 전화했을 때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고 했다.
수많은 차들이 똑같이 움직이지 못한 채
저마다의 답답함을 견디고 있을텐데...
“어머… 어떡하냐… 어떻게 ....”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그것뿐이었다.
그는 결국 새벽 2시에 도착했다.
문 열고 들어오는 그의 얼굴은
이미 지친 듯 굳어 있었다.
따뜻한 집안 공기 속에 들어서자
표정이 조금씩 풀어지는 게 보였다.
⸻
“라면… 하나 먹고 싶다”
외투를 벗고 겹겹이 입었던 옷을 벗으며
그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라면… 뜨끈한 라면국물… 먹고 싶다…”
나는 그 말을 들었지만
못 들은 척 거실을 오갔다.
그는 당뇨, 고혈압, 눈 질환으로
식단 관리를 하고 있는 상황.
하지만 동시에 마음 한쪽에서는
“오늘 같은 날은 그냥 먹게 해줘도 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계속 올라왔다.
반대편에서는
“지금 라면 먹으면 혈당 치솟을 텐데…”
이성적인 목소리가 또 끊임없이 들려왔다.
결국 나는… 그냥 못 들은 척했다.
그리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에휴, 난 참… 융통성도 없다.”
⸻
폭설의 밤이 남긴 것
그저 라면 한 그릇인데…
따뜻하게 챙겨줄 수도 있었을 텐데
너무 지나치게 이성적이기만 했나 싶다.
혹시 당신이라면
그 밤의 라면, 어떻게 하셨을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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