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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저녁, 아직 완전히 어둡지 않은 어슴푸레한 길 위를 걸었어요.
매미 소리가 끊임없이 울려 퍼지고, 빗방울을 머금은 나뭇잎은 한층 더 푸릇푸릇해 보였죠.
빼곡히 들어선 나무들 사이로 이어진 길은 마치 나를 감싸 안은 듯 아늑했습니다.
바깥은 이미 어둠이 내려앉았지만, 그 안에서 걷는 나는 묘한 평안에 잠겼습니다.
옆을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은 제각각의 이야기를 나누고,
혼자서 휴대폰을 보며 걷는 이도, 자전거로 바람을 가르는 이도 있었습니다.
벤치에 앉아 쉬는 이들, 멀리서 들려오는 비행기 소리까지—
모든 풍경이 어울리며 하나의 저녁 장면이 되었죠.
그 바람은 세찬 것도, 특별한 것도 아니었는데,
내 안에선 또렷하게 마음에 박혔습니다.
“내가 지금 이 자리에 있다”는 사실,
숨 쉬고, 걷고, 느낄 수 있다는 단순한 사실이
감사함으로, 곧 행복으로 이어졌습니다.
그 시간을 길게 붙잡아 두고 싶었어요.
온전히 그 감각에 취해 머무르고 있었으니까요.
그런데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아니, 어디까지 가 있는 거야? 이제 가야지~”
너무 취해 있었나 봅니다.
그 소리가 메아리처럼 들려왔으니까요.
그 말은 나를 돌아세우는 신호였고, 충만해 있던 내 감각은
다시 현실로 불려 나왔죠.
솔직히, 그 순간만큼은 참 눈치 없는 남편이었어요.
‘아, 시원하다’라는 가벼운 감탄이 아니라,
그 순간의 정점을 찍는 단 하나의 감각— 시원함.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저녁이었지만,
나무들이 품처럼 감싸준 길 위에서
마음은 열렸고, 세상은 새롭게 다가왔습니다.
행복은 그렇게 아주 작은 순간에도 찾아오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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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 아보하 언니 (Aboha Unni). All rights reser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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